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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8. <부정공>참봉초은공휘병기묘갈명(參奉樵隱公諱炳箕墓碣銘)
1. 문헌 목록 〉21. 21世 〉10. <부정공>동강공휘기호묘갈명(東岡公諱基昊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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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정공>동강공휘기호행장(東岡公諱基昊行狀)
東岡公諱基昊行狀 先考府君諱基昊字君洪東岡號也趙氏系出玉川高麗大將軍諱璋鼻祖也歷版圖判書諱洪珪 贈玉川府院君諱佺至諱元吉策勳官大匡輔國玉川府院君諡忠獻號農隱與圃牧陶冶諸先生並稱五隱生諱瑜號虔谷典農寺副正入我朝守議罔僕俗尙短喪獨行三年廬墓盡制 世宗朝有前副正忠孝之表閭 肅宗時南士建祠諱斯文 贈吏曹參議諱智崙蔭察訪四昆季友愛篤摰相好有亭諱穩尙瑞院直長諱淑珪察訪聿修祖德克守先亭后至諱元寶有至行鄕道薦狀金承宣寗漢撰碣公六世以上也五世祖諱洪耘贈通訓大夫司僕寺正高祖諱光表 贈通訓大夫承政院左承旨曾祖諱錫源 贈嘉善大夫戶曹參議兼同知義禁府事祖諱秉益號龍庵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考諱龍煥號雲坡通政大夫明陵參奉有行誼載昇平誌驪興閔參判丙承撰碣銘妣淑夫人慶州金氏元集之女惟孝惟敬桑嘉貞淑婦德甚備有三男二女高宗丙子五月十三日生公第伯也幼而聰慧學語便知讀書纔至八歲長瘧七年立課無闕十歲誦經文藝夙就有遺稿及長表儀端雅性度嚴明居家著孝友處鄕有惠愛爲人推服初年甚貧每見先府君以親老供菽水往往奉公出膺則心有傷載之歎 高宗癸卯筮仕除通仕郞 顯陵參奉此其儻來也終不進就逍遙林泉致力稼穡以勤儉立法及中身家業漸膄凡義所可則爲之勿吝施用之濶畧設塾延事 訓兒孫課經史九容九思書于座右夙夜警箴承襲庭訓及丁憂喪祭無憾終三年常如袒括晨昏省墓殫追遠誠自考至先壟未碣次第竪焉表銘潜德精建齋閣庖所護室以爲永世芬苾瞻依矜式之所重搆屋字於梓鄕前副正公先塋洞世居感慕之地棟樑礎瓦別取宏堅以爲宗室奉靈子孫世守之計戊巳歲惡會家衆焚數千金債券賙助婚喪失時者示其不復理財之意而丙子値甲歲荒溢目捐錢萬金除恤貧民戶賦擴設敎育機闕以免兒童失學鄕里稱德至於屬纊之前日排金十萬自子壻弟姪姊妹遠近族戚分等贈遺安堵生業各爲祭田之本至於外祖舅之塋分置祭田之資而先壟參議公直長公兩塋修碣己料金耗役弛捐金速竣貽于裕謀子孫追遠之誠丁丑正月二十七日終于寢享年六十二葬于順天郡住岩面主巖洞龍田麓先府君塋下丁坐原配慶州鄭氏龍驤衛兼五衛將永灝其考也婦德甚備孝事舅姑敬奉夫子聰敏絶倫閨助家計多有愛恤之行誼擧五男五女長房學鍾次房敏鍾三房星鍾四房相鍾五房英鍾張在烈崔炳魯黃鎬萬黃義禎金洛圭婿也孫淳卓淳昇長房生淳長淳炅淳奎淳直次房生淳東淳知淳政淳彦淳柱淳洪三房生餘幼不錄伏惟自府君下世以來寰宇大動方此滄桑世界嗚呼當日德愛之遺人人恒口稱不沫徽範懿行將托而傳后耶不肖以是爲懼將琢貞珉表阡道述事行且懼溢美兢執筆槩撮逮事時心目所記者如右不孝之罪無所逃云立言君子庶有考焉 不肖孤 學鍾 謹述 동강공휘기호행장(東岡公諱基昊行狀) 선고 부군의 휘는 기호요、 자는 군홍(君洪)이며 동강은 호이다。 (선조역대는 참봉공 운파(雲坡)행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음으로 첨록하지 않는다。) 고의 휘는 용환(龍煥)이요 호는 운파(雲坡)며 통정대부 명릉참봉으로 행의가 있어 「승평지(昇平誌)」에 실였으며、 여흥 민참판 병승(丙承)이 갈명을 찬하였고 비는 숙부인 경주 김씨 원집(元集)의 딸로 효도하고 공경하여 유순하고 부덕이 순비하였다。 고종 병자년(丙子年一八七六) 五월 十三일에 공은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면서 문득 글 읽을 줄을 알았으며、 겨우 八세가 되어 七년 학질에 과정을 빠짐없이 세워 十세에 경서를 읽으며 문예가 일찍 진취하여 유고가 있다。 장성함에 의표가 단아하고 성도가 엄명하였으며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밝이고 고을에서는 은혜와 사랑으로서 대하니 고을 사람들의 축복한 바 되었다。 초년에는 매우 가난하여 매양 선 부군이 늙은 부모 봉양이 부족함으로서 항시 근심하심을 보고 마음으로 가난을 근심하고 탄식하기도 하였다。 고종 계묘년(一九○三)에 처음 벼슬 길에 나가 통사랑 현릉참봉에 제수된 것은 성은의 높음이었다。 마침내 진취하지 아니하고 임천에서 노닐며 농사에 힘써 근검으로서 가규를 세웠으며 중년에 이르러서 가산이 점차 풍요하자 대범하게 의리상 쓸 곳에는 시용을 아끼지 않고 활용하여 서당을 설치하고 스승을 맞아들여 아손을 가르쳤다。 구용구사(九容九思)를 써 부쳐 경계하며 정훈을 이어 받았으나、 대고를 당하자 초상 제사에 유감이 없이 三년을 마쳤으며 항상 초상때 같이 밤과 새벽으로 성묘하고 멀리 사모한 정성을 다하여 선고 묘소로부터 선친에 이르도록 석의가 없는 산소에는 차제로 세우고 잠긴 덕을 새기었다。 성실하게 재각을 세워서 영세·향화·첨의 경묘의 장소로 삼고 거듭 집을 고향인 전부정 묘소 아래의 마을에서 대대로 살며 추원 감모한 땅에 세우며 특별히 굉장하고 견고한 기둥과 들보며 주초와 기와를 취하여 종실을 삼고 혼령을 봉안하여 자손이 세수할 계획을 세웠다。 무기년(戊己年)에 흉년이 드니 여러 사람을 보아 수천금 채권을 불살라 의리를 나타내고 혼인과 장사를 가난으로 때를 놓친 자를 보조하고 다시 재물 모을 생각 아니할 뜻을 보이었다。 병자년(丙子年)환갑을 맞이하였으나、 눈에 띄게 기근이 심하자 만금(萬金)의 돈을 내놓아 빈민의 호전에 대불하고 교육기관을 증설하여 아동의 실학(失學)을 구제하니 고을 사람이 그 덕을 칭송하였다。 운명 전일에 十만금을 배정하여 자·서·제·질·등 원근의 족척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생업을 편안하게 하고 각기 제전의 근본을 삼게 하였으며 외조 장인의 묘소에도 제전을 분치하고 선조 참의 직장 양영 수갈에 돈을 더내어 속히 준공하게 하여 그 유모를 끼치고 자손 추원의 정성을 밝히였다。 정축년(丁丑年) 一월 二十七일에 향년 六十二세로 정침에서 별세하니 순천군 주암면 주암동 용전록 선부군 영하(昇州郡住岩面主巖洞龍田麓先府君塋下)정좌원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경주 정씨 용양위 겸 오위장 영호(永灝)의 딸로 부덕이 심비하여 효도로서 시부모를 섬기고 부자를 공경하게 받들며 총민이 절륜하여 가산을 내조하며 애휼의 행의가 많이 있었다。 아들은 학종(學鍾)·민종(敬鍾)·성종(星鍾)·상종(相鍾)·영종(英鍾)이요 딸은 장재열(張在烈)·최병노(崔炳魯)·황호만(黃鎬萬)·황의정(黃義禎)·김낙규(金洛圭)의 부인이다。 손자 순탁(淳卓)·순승(淳昇)은 큰아들 소생이요、 순장(淳長)·순경(淳炅)·순규(淳奎)·순직(淳直)은 둘째아들 소생이며 순동(淳東)·순지(淳知)·순정(淳政)·순언(淳彦)·순주(淳柱)·순홍(淳洪)은 세째아들 소생이고 나머지는 어려서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부군이 별세한 뒤부터 천지가 크게 변동하여 방금 상전이 벽해된 세계라 아、 당일 덕과 사랑의 끼친 것을 사람들이 항상 구송하니 아름다운 규범과 성한 덕행이 장차 그에 따라 뒤에 전하여 질 것인가。 불초가 이를 근심하여 장차 빗돌을 갈아 묘동에 표하고자 사행을 기술하며 또 말이 아름다움에 넘칠가 근심하여 조심스럽게 붓을 잡아 대개 당시의 마음과 눈으로 기록한 자를 뽑아 이상과 같이 기록하니 불효의 죄를 속죄할 수 없음으로 입언 군자의 고찰을 바란다。 불초고(不肖孤) 학종(學鍾)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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